영화 아르고의 간단한 설명과 이란의 팔라비 왕조에 대한 설명과 이란의 백색 혁명에 대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1979년에 왜 이란에서 혁명이 났는지와 혁명도들의 분노가 미국을 향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면 이 영화도 훨씬 더 재밌게 볼 수 있고 오늘날 미국과 이란 관계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역사 배경 설명을 준비했습니다.
1. 영화 아르고 설명
아르고라는 영화는 1979년에 일어난 이란 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란의 혁명도들이 미국의 대사관을 점거하게 되고 미국의 외교관들을 인질로 잡게 됩니다. 대부분의 외교관들은 대사관에서 인질로 잡혀서 400일 이상의 끔찍한 나날을 보내게 되지만 여섯 명의 외교관이 대사관을 탈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캐나다 대사관저에 숨어 지내게 되는데 CIA의 비밀 작전으로 이들을 구출하게 되는 내용을 영화로 만든 것이 바로 이 아르고라는 영화입니다.
2. 이란의 역사
2-1. 이란의 서구화
제가 태어난 이후부터 미국과 이란은 항상 앙숙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에 한 번씩 큰 사건이 터지죠 그러면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되면서 국제 유가가 출렁이고 대한민국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1979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란은 서구 사회가 가장 좋아하는 중동 국가였다는 겁니다. 당시 이란을 다스리던 팔라비 왕조는 급진적인 서구화만이 이란을 선진국으로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을 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테헤란의 도시 계획을 서양식 모델에 맞춰서 설계를 하고 서구식 대학과 사회 개혁을 들여오는데 굉장히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의 눈에는 이란이 중동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로 보였고 이 팔라비 왕조의 부부 같은 경우에는 유럽이나 미국의 잡지에서 패션 아이콘으로 많이 다루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대한민국에도 강남의 테헤란로라는 도로가 있을 정도로 많은 나라들이 이란을 자신의 나라의 개발 모델로 동경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79년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라고 하는 종교 원리주의자가 이란의 왕을 몰아내고 혁명에 성공하면서 이란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변하게 되고 미국과 이란은 원수가 됩니다.
2-2. 팔라비 왕조와 반대세력
팔라비 왕조에 대항해서 이런 혁명이 나게 됐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팔라비 왕조의 역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할레비 왕조는 사실 역사를 할 것도 없습니다. 이 왕조 자체가 아버지와 아들 두 대밖에 안 간 왕조입니다. 그리고 1920년대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게 된 그런 왕조입니다. 시조는 기마대의 군인이었습니다. 서구식 군사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합리적인 서구식 체제가 이란의 뿌리를 박아야 이란이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이고 그것을 가로막는 것이 이란의 봉건적인 종교관이라고 생각을 하던 사람입니다. 여성들의 얼굴과 몸을 가리는 차도르나 니캅 같은 의상을 금지시키는 개혁을 밀어붙이게 됩니다. 팔라비 왕조의 철학에 반기를 둔 두 가지 세력이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로 시아파 성직자들이었습니다. 국가와 종교를 분리시키면 자기네들의 힘이 약해지기 때문에 팔라비 왕조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이제 소상공인들이었습니다. 중동 국가에 가면 바자르라고 하는 전통시장이 한 도시의 핵심입니다. 팔라비 왕조 같은 경우에는 서구의 대기업들의 편을 훨씬 더 많이 들었고 소상공인들의 이익을 챙기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상공인들과 그들의 자녀들 즉 학생들이 팔라비 왕조에 반항하는 두 번째 세력이 됩니다.
2-3. 시아파 성직자의 권력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시아파 성직자이기 때문에 시아파 성직자들이 이란에서 왜 그렇게 막강한 권력을 옛날에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거의 대부분 옛날에 왕들은 어떤 종교를 자기의 명분을 만드는 데 사용을 합니다.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들이 가톨릭 교회의 장남이라는 타이틀을 쓰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중동에서도 이슬람의 두 가지 종파인 시아파나 수니파의 수호자다라는 식으로 왕조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1600년대 이후로 지금의 터키를 중심으로 한 오스만 트루크 제국이 자신들을 전 세계 수니파의 수호자라고 자처했기 때문에 오스만 트루크 제국과의 라이벌 국가였던 이란 제국은 전통적으로 자기네들을 시아파의 수호자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란의 정치는 시아파 성직자들과 항상 같이 갔었고 그렇기 때문에 시아파 성직자들은 이란에서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팔라비가 근대 국가를 만들면서 서구와 마찬가지로 종교와 국가를 분리시키려고 하자 자기네들의 권력이 손을 벗어날 것을 두려워한 성직자들이 팔라비 왕조한테 반기를 들게 됩니다. 마침내 1935년에 옛날에 종교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왕정에 대한 반란이 나게 되는데 이것을 팔라비 왕조가 아주 잔혹하게 탄압합니다. 그러면서 시아파 성직자들은 속으로 팔라비 왕조를 갖다가 끊임없이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소상공인들의 자녀들 같은 경우에는 페르시아의 비즈니스맨들한테는 관심이 없고 서구의 대기업들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을 해서 팔라비 왕조를 미워했습니다. 거기에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회사가 있습니다. 바로 Anglo-Iranian Oil Company입니다. 이 회사는 역시나 석유회사였습니다.
2-4. 석유 쟁탈전
중동 문제를 얘기할 때 우리가 석유를 빼놓고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이란도 마찬가지입니다. 1901년에 영국인 사업가인 William Knox Darcy라는 사람이 이란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이 이란을 당시에 다스리던 카자르 왕조와 거래를 하게 됩니다. William Knox Darcy가 오늘날 돈으로 약 40억 정도에 해당하는 이만 파운드를 왕한테 주게 되고 그 대가로 60년 동안 무제한으로 석유를 채굴할 수 있는 권한을 따내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에 석유가 발견될 경우에 매출이 아니라 비용을 전부 다 제외한 수익의 16퍼센트만 왕한테 주면 된다고 하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계약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1차 대전이 터지면서 전투기나 기갑 부대 같은 것이 생기게 되고 헨리 포드의 자동차 대량 생산으로 이 자동차들이 길을 메우기 시작하면서 이 기름이 한 국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자원이 됩니다. 그런데 이란 같은 경우에는 그 옛날에 사인해 이 60년 계약 때문에 기름값이 올라가고 기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남에도 그 수익을 다 영국이 가져가고 일하는 그 혜택을 못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William Knox Darcy의 회사가 인수합병을 거듭하면서 Anglo-Iranian Oil Company로 바뀌게 되고 그것이 오늘날 영국 최대 기업 중에 하나인 British Petroleum Company라는 기업의 전신이 됩니다. 영국은 해군을 가지고 전 세계를 제패한 대제국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기름이 이렇게 확보가 되자 해군의 주력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게 되고 영국 해군이 Anglo-Iranian Oil Company의 대주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정부가 투자를 한 일종의 공사가 이란의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민족주의 학생운동가들이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영국 석유회사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National Front라는 당을 만들게 되고 National Front 출신 정치인인 모사덱이라는 사람이 나중에 총리에 당선이 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영국 석유회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자기 정치 기반이기 때문에 총리가 되자마자 한 첫 번째 개혁이 영국과 이란 사이에 석유 수익 분배를 갖다가 재조정하겠다. 이란의 모든 석유를 다 국유화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영국 입장에서는 땅 속에 있는 기름은 이란 것이 맞을 수도 있지만 그 위에 있는 여러 가지 시추시설과 수송시설 정유시설은 다 영국이 지은 거라고 하면서 영국의 엔지니어들을 다 철수시키고 국제재판소에서 이란을 상대로 소송에 들어가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 영국 정부는 MI6를 이용해서 모사덱이라는 인물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 계획이 영국의 힘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고 생각한 윈스턴 처칠이 미국의 CIA에게 같이 작전을 하자고 손을 내밀게 됩니다. 처음에는 미국에서 이 제안을 거부합니다. 첫째 우리가 영국 기름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그 당시 국무부에서 왔다 갔다 한 메모를 보면 이란에 이런 식으로 손댔다가 중동 전체가 불균형을 이루게 되면 미국에도 유리할 게 없다는 거를 굉장히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미국에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들어오게 되는데 Nationalism이 나중에 공산주의로 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 결국 이 작전을 승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영국과 미국의 비밀 작전으로 왕당파 쿠데타가 일어나서 모사덱을 쫓아내게 되고 이 왕당파 쿠데타 세력의 지휘 하에 끔찍한 독재국가로 변신하게 됩니다.
2-5. 백색 혁명
이 왕당파 쿠데타는 White Revolution이라고 하는 이 모사드의 정책을 갖다가 다 어떻게 보면 되돌리는 정책을 펴게 됩니다. 그러니까 모사덱 같은 경우에는 왕의 힘과 국민의 힘이 헌법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왕의 힘을 뺏어가지고 최대한 국민한테 주려고 하는 여러 가지 정책을 폈다면 White Revolution에서는 다시 민중의 힘을 갖다가 왕한테 되돌려 놓는 그런 정책을 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반대를 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가두고 고문하고 암살해버리는 SAVAK이라고 하는 왕당파 비밀경찰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모사덱의 편을 들었던 여러 지식인들 또는 정치가들 같은 경우에는 이 나라를 떠나서 레바논이나 파리나 혹은 이라크 같은 곳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특히 이제 서구 쪽으로 도망을 간 사람들을 중심으로 Freedom Movement of Iran라고 번역되는 왕정을 전복시키거나 이란을 민주화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전선이 형성되게 됩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이제 반미 운동과 이란의 민주화가 하나가 돼 버렸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많은 미국의 지식 1953년에 White Revolution을 지원한 것이 CIA와 미국이 한 최고의 외교 실수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르고를 만든 제작진은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를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2-6. FMI의 설명
Freedom Movement of Iran를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을 보면 미국이나 프랑스 대학에서 공부한 약간 히피 성향의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첫 번째 이란 혁명 정부에 대통령을 지낸 Banisadr 같은 경우에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호메이니의 가장 중요한 측근 중에 한 명이었던 Sadegh Ghotbzadeh라는 사람 같은 경우에는 조지타운 대학 출신입니다. 혁명이 이슬람 근본주의적 혁명이 된 것은 호메이니라는 인물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그 사람은 세게 팔라비 왕조를 비판하다가 이란에서 쫓겨나서 이웃 나라인 이라크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라크에는 나자프라고 하는 시아파 성지가 있는데 거기서 생활을 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국가관을 설파하는 여러 팸플릿이나 책을 썼습니다. 호메이니의 주장은 Wilayat al faqih라고 하는 이슬람의 정도와 이슬람의 법도에 능통한 사람들이 나라를 배후에서 다 조정해야 그 나라가 바로 서고 지금의 이란은 서구의 어떤 문란한 도덕이 무너뜨리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이 정치와 종교를 합쳐야 된다는 것이 20세기 근대 국가에 너무 맞지 않는 주장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말에 수긍을 하는 사람들도 실천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 사람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만 속으로는 좀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Freedom Movement of Iran와 호메이니가 힘을 합치게 됩니다. Freedom Movement of Iran는 도시에 있는 지식인들만을 가지고는 이란 혁명을 성공시킬 수 없을 거라고 믿게 되고 이란에 전통적으로 수많은 모스크와 네트워크가 돼 있는 성직자들의 힘을 빌려야 된다고 하면서 호메이니와 접선을 하게 됩니다. 그때쯤 팔라비 왕조에 대한 불만이 여기저기서 이란에서는 폭력적인 형태로 터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콤이라고 하는 이란의 신학도들이 있는 도시에서 시위가 나게 됩니다. 그리고 연달아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총파업과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학생 운동이 이란을 불바다로 만들고 있는 그 시점에 Freedom Movement of Iran에서 호메이니를 프랑스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로 데리고 옵니다. 여기서 이제 그 Freedom Movement of Iran는 그동안 서구의 학생 운동에서 배운 여러 가지 Propaganda 도구를 호메이니한테 알려줍니다. 예를 들어서 라디오 방송에 출연을 시켜주거나 이란의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갖다가 팩스로 작성해가지고 유럽에나 또는 미국에 있는 신문사에 동시에 보내는 이런 기술을 통해서 호메이니가 이란의 목소리 또는 혁명의 상징이 됩니다. 그래서 이제 아르고라는 영화에서도 보면은 구출 작전의 일환으로 할리우드가 가짜 프로덕션 회사를 만들게 되는데 할리우드에도 호메이니 추종자들 투성이다라는 것을 얘기를 하는 것이 호메이니의 강력한 이미지와 카리스마 때문에 서구에서도 그의 추종자가 많았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란의 왕은 건강이 악화됐다는 핑계로 치료를 받겠다고 미국으로 도망을 치게 되고 이란의 왕이 임명한 총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가 만들어집니다. 그때 호메이니가 이란에 들어갑니다. 그는 이란에 들어가자마자 학생운동가들과의 거리를 두고 혁명에 가담했던 시아파 성직자들 극단주의적 원리주의적 성직자들의 본부로 들어가서 혁명을 지도하게 되면서 이란 혁명은 종교적인 색채를 띠게 됩니다. 그리고 Freedom Movement of Iran를 이끌었던 서구화된 지식인들을 제거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의 대부분 사형당하거나 나라 밖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특히 혁명도들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미국 외교관들의 치외법권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 미국과 협상을 하라고 그랬던 학생운동가들이 그때 거의 대부분 제거가 됩니다. 그때 미국에 대항하는 시아파의 지도자로서 호메이니의 명성이 굳건해지게 됩니다. 사실 이란 사람들이 영국이 그동안 주적이었는데 그것이 미국으로 옮겨가게 된 것은 샤가 미국으로 도망을 갔고 미국이 샤를 이란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달라고 그랬는데 주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 아르고라는 영화를 통해서 나옵니다. 그때부터 이란과 미국은 원수가 되고 그 나쁜 관계가 계속 중동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 하나가 됩니다. 세계 역사적으로 보면 1979년에 중동에 세 가지 큰 사건이 동시에 납니다. 이란 혁명이 일어나고 소련 부대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신성한 도시인 메카에 수위 극단주의자들이 인질극을 벌이게 됩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이 동시에 나면서 중동의 균형이 깨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1979년이 중동에 평화가 깨진 해라고 얘기를 합니다.
3. 영화 아르고를 보고 느낀 점
영화 아르고를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어떤 사람을 이제 미워할 때 그 사람을 나랑 같이 미워하는 사람은 다 나랑 한 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호메이니도 샤를 미워하기 때문에 학생운동가들은 호메이니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나중에 이제 이란의 역사를 보면 샤보다 더 끔찍한 독재와 많은 일들을 저지른 인물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호메이니라는 인물이 프랑스에 와서 마이크를 잡게 됐을 때 갑자기 극단적인 아이디어가 주류 의견이 돼버렸습니다. 근데 오늘날 같은 sns 시대는 모든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있기 때문에 마이크를 잡고 있는 사람의 말이라고 그래서 다 들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영화설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영광의 날들, 영화 기본 설명, 알제리와 프랑스의 역사, 나의 생각 (0) | 2022.11.08 |
---|---|
영화 에펠, Gustave Eiffel, 에펠탑의 역사, 내생각 (0) | 2022.11.07 |
영화 킹덤 오브 헤븐, 십자군 전쟁 영화, 역사 배경 설명 (0) | 2022.10.27 |
영화 지붕 위의 기병, 영화 소개 및 이탈리아 역사 소개 (0) | 2022.10.25 |
영화 노매드랜드, 영화 소개 및 영화 이야기, 감상평 (0) | 2022.10.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