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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설명

영화 에펠, Gustave Eiffel, 에펠탑의 역사, 내생각

by JAVERICK 2022.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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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이 지어지고 있는 모습

오랜만에 프랑스에서 블록버스터 영화가 나왔습니다. 에펠탑을 지은 구스타프 에펠의 인생을 기반으로 한 에펠이라는 영화입니다. 배우 로망 뒤리스 주연입니다. 우리가 에펠탑에 대해서는 세계 어느 나라에 있는 어린아이한테 물어봐도 갈 정도로 프랑스와 파리를 대표하는 아이콘입니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지은 구스타프 에펠이라는 인물 그리고 프랑스의 당시 사회 분위기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 에펠을 보기 전에 이런 시대 배경 설명과 에펠의 인생에 대해서 알고 보면 훨씬 더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오늘 글을 준비해 봤습니다.

1. 에펠탑의 아버지, Gustave Eiffel

이 영화에서도 원래 에펠은 지하철을 짓는 거에 관심이 있어서 이 지하철에 대한 로비를 하기 위해서 어떤 장관이 주관하는 만찬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장관이 에펠한테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지하철은 민중에게 꿈을 꾸게 하지 않아 지금 프랑스한테 필요한 것은 세당의 수치를 씻는 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만국 박람회는 많은 프랑스 엔지니어들한테 프랑스의 자존심을 보여줄 만한 센터피스를 디자인할 공모전을 열게 됩니다. 거기서 구스타프 에펠이라고 하는 사람이 운영하는 철강 회사에서 낸 300m 높이의 탑이라는 안이 채택이 되면서 에펠탑이 지어지게 됩니다. 구스타프 에펠은 기종 출신의 엔지니어였습니다. 원래 프랑스 최고 기술학교인 Ecole Polytechnique de Paris에 들어가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거기서 낙방을 하고 Ecole Centrale de Arts et Manufactures이라고 하는 학교에 진학을 하게 됩니다. 에펠은 Ecole Centrale de Arts et Manufactures을 졸업한 뒤 석탄 쪽 사업을 하는 어머니의 소개로 철도에 들어가는 철을 제련하는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됩니다. 거기서 커리어를 쌓다가 당시에 철도를 건설할 때 가장 중요한 일인 다리를 짓는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젊은 나이 27살 정도의 보르도에서 굉장히 중요한 철교를 짓는 것을 감독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1858년에서 1860년 사이에 지어졌고 오늘날까지 보르도에 서 있는 파스트렐드 에펠이라는 다리입니다. 이 영화에 보면 에펠이 보르도에서 철교 작업을 감독하던 중에 아드리안이라고 하는 첫사랑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에펠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1882년에 착공한 가라빗 리애덕트라고 하는 큰 다리 때문입니다. 그 당시로는 다리가 말도 안 되는 길이었습니다. 560m가 넘는 길이의 다리를 성공적으로 완공함으로 해서 레지 드 페어 철의 마법사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에펠은 미리 다리가 어떻게 조립할지에 대한 정확한 도명과 그 다리에 들어갈 모든 철로 된 제품만 있으면 그것을 뛰어난 기술자가 없는 곳에서도 기차나 배로 운송해가지고 설명서를 보면서 이케아 가구처럼 조립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다리들을 설계하고 그 다리의 kit을 당시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여러 식민지에 보내서 그곳에서 조립을 할 수 있게 하는 사업을 벌여서 막대한 돈을 벌게 됩니다. 오늘날도 당시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가면 오늘날 호찌민 시티라고 불리고 당시에는 사이공이라고 불렸던 도시의 포스트 오피스가 에펠이 지은 구조물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에펠이 어떤 사교 파티에 갔을 때 정부 관료들이 베트남에서 당신이 훌륭한 일을 많이 하고 있다고 들었다고 얘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펠의 작품 중에 베트남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휴의 다리는 1899년 즉 에펠탑이 지어진 이후에 지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건 시대가 조금 안 맞는 설정입니다. 이렇게 해서 에펠이 엔지니어링 계에서는 굉장히 혁신적인 건축 방법과 그것을 판매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에펠이 대중적인 스타가 된 것은 자유의 여신상 안 골조를 만들면서입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에 보면 미국 측에서 구스타프 에펠한테 자유의 여신상에 대한 공헌을 인정하면서 명예 미국 시민권을 수여하는 장면이 있고요 에펠의 이름이 이것을 통해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2. 에펠탑의 역사

2-1. 에펠탑 건설의 계기, 만국 박람회

프랑스는 1889년에 만국 박람회를 개최하게 되면서 센터피스로 거대한 탑을 짓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의 서양 열강들한테 만국 박람회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를 많이 세우고 더 많은 나라와 해상 교역을 하는 나라일수록 강대국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나라와 교역을 하고 있는 모든 나라의 최신 상품과 가장 뛰어난 공예품 그리고 가장 발전된 기계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을 수 있다는 것이 그 나라의 국력 그리고 그 나라의 자존심의 상징이었습니다. 프랑스는 1850년대 60년대에 이미 만국 박람회를 개최를 했었습니다. 특히 프랑스에게 1889년에 만국 박람회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루이 14세 때부터 즉 1600년대부터 유럽에서 가장 땅이 크고 인구가 많고 강한 군대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1870년에 세당이라고 하는 동네에서 프로이센의 군대가 프랑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파리까지 밀고 들어오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알자스와 로렌 지역을 독일에게 양도하는 수치를 겪게 됩니다. 1870년에 프랑스의 패배를 이끈 사람은 다름 아닌 나폴레옹 3세의 황제였습니다. 그 이후로 왕정이 우리나라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다라고 생각하는 프랑스 사람들의 의견 때문에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1889년 만국 박람회는 공화국으로서 프랑스가 맞는 만국 박람회였기 때문에 민주적이고 선진적이고 미래 지향적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세계 사람들이 우리에게 독일에게 패배한 것이 황제가 무능했기 때문에 패한 것이지 프랑스 자체가 망국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고 증명을 해야 되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2-2. 프랑스 건축 전통과 에펠탑

우리의 눈에는 에펠탑이 굉장히 아름다워 보이지만 사실 에펠탑이 처음 지어졌을 때 프랑스 사람들 중에서 못생겼다고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1889년에 만국 박람회의 센터피스 공모전에는 프랑스에서 내놔라 하는 예술가들과 기술자들이 전부 다 공모작을 냈을 겁니다. 그런데 에펠의 탑이 선정된 데에는 그 높이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그 당시에는 300m 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 세계에 300m가 넘는 건축물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리고 에펠탑이 지어진 후에도 무려 40년 동안 전 세계 에펠탑보다 더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이 프랑스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을 짓는 경로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술사에서도 프랑스 건축물의 특징을 뽑으라고 그러면 수직성이 강조되는 건축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중세 중반에 고딕 건물의 특징이 돌로 벽을 지었지만 벽을 굉장히 얇게 만들고 창문을 위아래로 굉장히 길게 만들어서 건물이 높기도 하지만 실제로도 더 높게 보이게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파리를 몽마르트르에서 내려다보면 왼쪽에 이제 노트르담이 보이고 에펠탑이 보이고 그 가운데쯤에 굉장히 큰 건물이 하나 더 있는데 오늘날 나폴레옹의 묘를 보러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Les Invalides라는 건물입니다. Les Invalides의 건물에 대해서 관광 투어가이드들이 해설을 할 때 이 건물은 사람의 눈높이에서 천정까지 눈이 이동을 할 때 막히는 게 하나도 없이 디자인을 해서 실제보다 높이 보이게 만든 것이 특징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 진화의 어떤 정점이 에펠탑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3. 파리사람들이 에펠탑을 반대한 이유

에펠이 이 탑을 짓기 시작한 다음부터 즉시 굉장히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 반대를 딛고 일어나는 모습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높은 건물이 옆에 서 있는 거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옛날에 석회나 벽돌 또는 흙으로 집을 짓던 시대에는 집이 무너지는 일들이 상당히 흔했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고층 건물이 갑자기 지어지면 저 건물이 무너진다면 누구 집 또는 누구 머리 위로 떨어질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에펠탑이 처음 지어지기 시작했을 때 에펠탑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시위를 하기 시작합니다. 만약에 이 건물이 무너져서 누구의 재산이 파손되거나 인명 피해가 생긴다면 누가 책임질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펠은 보험사를 찾으러 다니는데 어떤 보험사도 이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펠이 결국 자기 돈으로 에펠탑 주변에 사는 사람의 보험을 들어줬다고 합니다. 또 이 건물이 똑바로 올라갈지 그리고 건물이 올라간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거기를 찾아올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굉장히 강했기 때문에 당시 에펠은 투자자를 구하는 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어요. 에펠탑 전체에 들어가는 돈 중의 80%를 자기 개인 자산으로 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에펠이 오랫동안 거래를 하던 금융사에 찾아갔는데 반대 여론도 심하고 완공에 대한 확실성도 없고 수익성에 대한 확신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돈을 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에펠이 화를 내고 나오면서 자기의 모든 개인 자산을 담보 잡혀서 에펠탑을 완공해 나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에펠탑의 안전성에 대한 문제 그리고 사업성에 대한 논란 등 여러 가지 반대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프랑스다운 논란은 어떻게 보면 이 에펠탑이 흉물이어서 지으면 안 된다는 논란이었습니다. 수십 명의 예술가들과 건축 디자이너가 에펠탑이 파리의 조화로운 도시 조경을 망친다고 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오늘날 에펠탑 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특히 밤에 조명이 켜져 있을 때 그런데 왜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이것을 흉물이라고 느꼈을까요? 19세기 중반에 파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파리의 아름다움이 적립이 됩니다. 1800년대 중반에 바론 오스만이라고 불리는 도시 계획자가 프랑스의 Grands Boulevards라고 하는 대로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Grands Boulevards는 우리가 파리 하면 떠올리는 양쪽으로 가로수가 즐비하고 하얀색 6층 건물에 둥그스름한 푸른색 지붕이 올려져 있는 그 길들입니다. 모든 건물이 층수도 똑같고 색깔도 똑같고 디자인도 똑같기 때문에 각자 건물들이 다르지만 마치 도시 전체가 한 번에 디자인된 것처럼 보이는 그 모습이 많은 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파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에펠탑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은 이런 도시의 조화를 깨는 건축물이 있을 때마다 상당히 최근까지 많은 시위를 해왔습니다. 예를 들어서 1970년대 파리의 유일한 고층 건물인 Tour Montparnasse가 지어졌습니다. 우리나라 63 빌딩과 비슷한 높이고 그냥 한국에서 굉장히 흔한 유리 고층 건물입니다. 파리에는 유리 고층 건물이 돌아보면 이거 딱 하나밖에 없는데 그 이후가 사람들이 이 Tour Montparnasse를 너무 싫어해서 그 이후로 파리 시에서 빌딩의 높이를 규제하는 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 파리에서 굉장히 논란이 됐던 건물은 퐁피두 센터라는 건물입니다. 빌딩의 파이프를 밖으로 꺼내서 장식 요소로 사용을 했는데 그 당시의 평론가들이 파이프로 만들어진 노트르담이라고 하는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붙여줬을 정도로 프랑스의 평론가들이나 디자이너들이 안 좋아하는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5. Gustave Eiffel의 몰락 1970년대도 이럴 정도였으면 그것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1880년대에 이런 반대는 훨씬 더 심했습니다. 하지만 에펠탑이 이제 완공이 되자 사람들은 바로 탑의 진가를 알아봤다고 합니다. 에펠이 여기 20년 동안 사업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그 안에 아파트를 지어 놓고 여러 가지 과학 실험을 한 걸로도 유명합니다. 에펠탑을 통해서 에펠은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영광도 잠깐 얼마 안 있어서 굉장히 큰 스캔들에 휘말리게 됩니다. 수에즈 운하에 차 안에서 굉장히 큰 성공을 거뒀던 Ferdinand de Lesseps이라고 하는 프랑스의 사업가가 미주의 가장 얇은 부분인 파나마를 뚫고 지나갈 수 있는 운하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면서 에펠을 말하자면 시공업자로 선정하게 됩니다. 결국 Ferdinand de Lesseps의 사업이 부도가 나게 되고 사업에 관련됐던 모든 사람들이 체포되고 재판을 받게 됩니다. 에펠도 체포돼서 2년형을 받게 됩니다. 이런 스캔들에 휘말린 후 아무래도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인프라 사업에서 에펠은 손을 떼게 되고 공기역학의 연구에 심취하게 된다고 합니다. 프랑스 최초의 윈드 터널이 에펠 공기역학 실험실에 만들어지게 되고 오늘날까지 그 실험실은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실험을 통해서 Louis Charles Breguet와 함께 Breguet Laboratire Eiffel이라고 하는 비행기까지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프랑스의 여러 가지 산업 부분에서 항공사업이 2순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항공사업의 주춧돌을 둔 사람도 에펠로 알려져 있습니다.

2-4. 다시 태어난 에펠탑

에펠탑은 원래 임시 구조물로 설계가 되었고요 20년 후에 철거될 예정이었습니다. 에펠은 자기의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는데 마침내 솔루션을 찾았습니다. 그 당시에 새로운 기술이었던 라디오가 송신탑을 높이 세울수록 좋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에펠탑은 라디오 안테나를 세우기에 가장 좋은 위치였고 송신탑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때는 5개의 거대한 전선을 내려서 그거를 더 작은 안테나와 연결을 해서 독일의 무선 송신을 들을 수 있는 거대한 도청기로 사용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에펠탑이 파리 또 프랑스 전체를 상징하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때죠 1945년에 연합군이 파리를 수복하자 레지스탕스에 가담을 했던 자유 프랑스군들이 에펠탑에 올라가서 나치 깃발을 떼고 거기다 프랑스 깃발을 올리게 되는 장면이 굉장히 굉장히 유명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모든 파리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나지의 지배가 끝나고 프랑스의 독립을 되찾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에펠탑 위의 프랑스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는 것은 프랑스가 아직도 프랑스 사람들의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에펠탑이 송신탑으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송신 기술이 나올 때마다 에펠탑이 조금씩 커집니다. 그래서 원래 300m로 딱 디자인이 됐는데 그 위에 라디오 안테나가 올려지면서 320m 타워가 됐다고 합니다. 그 위에 또 tv 안테나가 올려지면서 약 330m가 됐는데 얼마 전에 프랑스에서 큰 뉴스가 있었습니다. 철의 여인이라는 것은 파리 사람들이 에펠탑을 부르는 애칭입니다. 140세가 되셨는데도 아직도 키가 크고 계신다 라는 익살맞은 제목이었는데 tv 안테나 위에다가 또 디지털 라디오 안테나를 얻게 되면서 에펠탑이 더 높아졌다는 기사였습니다.

3. 영화 에펠을 보고나서 내 생각

파리는 참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중세기부터 쭉 내려온 전통의 아름다움이고 첫째로 그리고 두 번째는 오스만 시대부터 만들어온 조화와 획일성의 아름다움입니다. 모든 건물의 색깔과 높이와 디자인이 대략 비슷한 데서 나오는 상쾌함이나 정리 정돈된 느낌인 것입니다. 그런 만큼 이 정도에 벗어나는 것을 만들어서 자기의 업적과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어떤 도시보다 파리에서 훨씬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틀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했던 에펠의 이야기 그리고 파리 사람들에게 그것을 자기 도시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든 에펠의 집념과 용기는 우리 모두에게 영감이 되는 이야기 같습니다. 밤에 빛나고 있는 에펠탑을 볼 때 우리가 참 예쁘다고 느끼지만 사실 그 에펠탑을 지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멋있지 않나라는 생각에 오늘 이야기 한번 풀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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