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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설명

영화 엘비스, 로큰롤 음악과 1950년대 미국문화

by JAVERICK 2022.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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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포스터

엘비스 프레슬리의 인생의 기반으로 하고 있는 영화 엘비스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소개와 엘비스 프레슬리가 활동하던 시대에 대한 배경과 엘비스라는 아티스트로서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1. 엘비스 프레슬리

엘비스 프레슬리는 1950년대 미국 팝 음악에서 인기의 절정을 찍었던 로큰롤 가수입니다. 너무 인기가 많아서 The king of Rock and Roll이고 불렸습니다. 나중에는 미국에서 워낙 독보적인 아티스트가 되었기 때문에 그냥 The King이라고 불렸습니다. 엘비스의 팬들의 팬심은 정말 뜨거웠습니다. 엘비스가 죽은 지 거의 40년 후에도 길에 엘비스의 옷을 입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가끔씩 미국의 신문에 엘비스가 사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주장을 하는 기사가 나올 정도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친 아티스트입니다. 1956년에 엘비스 앨범의 매출이 미국 전체 음악 산업에 1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하와이에서 진행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콘서트가 세계 최초로 위성 생중계를 했을 정도로 팝 음악에 있어서 독보적인 역사적 족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마이클 밀어라는 한 미국 코미디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세대 하드코어는 다음 세대의 엘리베이터 음악이라는 말했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어떤 음악에 열광하기 시작하면 그 음악은 그 당시에는 굉장히 하드코어 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그 세대가 자라나고 이 음악들이 주류 음악에 편입이 되기 시작하면서 사무실 엘리베이터나 슈퍼마켓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으로 변해가면서 처음의 강렬함과 충격이 사라져간다는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엘비스라는 영화가 대단하다고 생각한 부분이 1990년대 사람들이 느꼈을 충격을 그보다 훨씬 더 시끄럽고 훨씬 더 복잡하고 훨씬 더 자유분방한 시대의 사람인 우리한테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게 한 연출과 스토리라인, 카메라 워크와 같은 것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엘비스라는 아티스트가 가지고 있던 창작과 예술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잘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엘비스가 활동하던 시대상을 굉장히 잘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한 아티스트가 어떤 시대에 살았는지를 알고 보면 영화를 훨씬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습니다.

2. 로큰롤 음악과 1950년대 미국문화

이 영화를 보면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이 흑인 음악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유로 이 음악을 금지 시키려고 정치권에서 압박을 넣는 장면이 있습니다. 실제로 로큰롤의 기원을 보면 엘비스 프레슬리 스스로가 이야기를 했듯이 흑인의 R&B라는 음악 장르와 백인들의 컨트리 음악이 합쳐져서 태어난 음악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처럼 크로스오버가 당연시되는 시대는 이상한 것이 아니지만 1950년대 미국은 인종 분리 정책을 펼치고 있던 시대입니다. 백인과 흑인은 같은 학교도 다니지 않고 레스토랑, 화장실까지 백인 전용 흑인 전용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인 보수층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음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기사들을 보면 엘비스에 대해서 음악에 대해서 이러한 표현을 썼습니다. 원주민들의 짝짓기 춤 같다. 일종의 동물주의라고 엘비스의 음악을 표현했습니다. 1950년대 미국의 베스트셀링 책 중에 하나였던 U.S.A Confidential이라는 책에서는 로큰롤 음악 전체를 아프리카 정글을 배경으로 한 에로틱한 춤 대중들의 열광과 의식적 난교와 연결되어 있는 이단 종교 같다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한 정신과 의사는 로큰롤 음악은 전염병처럼 10대들이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도록 하는 이상한 정신상태를 퍼트린다고 말했습니다. 왜 미국의 언론이나 정치가들 지식인들이 이렇게까지 로큰롤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1950년대 미국의 인종 관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9세기 초 중반 정도에 많은 사람들이 영국이 세계 최강 대국이 된 것에 대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영국은 인구가 그렇게 많지 않은 조그만 섬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라가 자기 나라보다 몇 배 큰 흑인과 아시아인들이 살고 있는 나라들을 정복해서 지배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면서 앵글로색슨 민족의 민족성이 그들을 세계의 지배계층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식민사관이 성립되게 됩니다. 그들에 의하면 북유럽 문화는 북유럽의 종교, 철학, 음악, 기술과 같은 이런 모든 문화가 전부 다 인간의 이성을 증진시키고 동물적인 감정을 억누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된 나라들은 대체로 이성보다는 감성을 자유롭게 표출하기 때문에 장기 계획이나 복잡한 기계 설계 같은 감성보다 이성에 맡겨야 하는 일에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북유럽과 가깝고 비슷한 문화를 가진 나라일수록 이성에 비중을 중요시하고 북유럽과 먼 나라일수록 감성을 중요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성의 비중이 중요한 나라는 도시 문명이나 복잡한 기술 과학 문명을 이룰 수 없다는 이론들이 19세기 중반부터 영미권에 돌기 시작합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일반 대중들은 이러 사고방식을 상당부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앞서 말한 기사 내용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3. 저항의 상징이 된 엘비스

하지만 10대들은 항상 어른들이 듣지 말라고 하는 음악에 열광하기 때문에 어른들이 엘비스 프레슬리와 로큰롤 음악을 공격하면 할수록 엘비스 프레슬리의 인기는 더 커져만 갔습니다. 남부 주에서 이미 10대들이 흑인들의 음악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미국을 남북으로 나누면 남부 주들은 옛날에 노예제도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인종차별이 익숙하고 인종 분리법도 그만큼 엄격했습니다. 남부 주들 중에서 최고의 대도시가 테네시 주에는 멤피스라고 하는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멤피스에 모여드는 흑인 노동자들이 놀러 가던 Beale Street에서 대중문화가 만들어집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Rhythm and blues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보면 엘비스 프레슬리가 B.B. King같은 멤피스를 주름잡는 Rhythm and blues 아티스트와 친분을 유지하고 그들과 같이 활동하면서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만들어갑니다. 그리고 이쪽에서 자기가 들은 멜로디나 가사를 자기 음악에 이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공식적인 인터뷰에서도 자기가 Beale Street의 R&B 아티스트들에게서 받은 영감과 자신의 곡의 원작자가 누구였는지를 밝힌 것으로 유명합니다. 엘비스의 파격은 미국 대중문화의 성공 공식으로서 자리 잡게 됩니다. 그 이후부터 모든 대중문화는 다음에 뭔가 또 틀을 깨고 파격적인 걸 선보일 사람을 찾게 됩니다. 그 이전에 아티스트들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을 잘 충족시켜주는 사람이었던 반면에 이 기대를 깨고 더 새로운 것을 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위대한 아티스트가 탄생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엘비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음악만 바꾼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바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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